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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여행 : 약천사와 방주교회 우리나라에서 종교는 참 평화로운 곳이면서 또한 민감한 곳이도 합니다. 제주도에 있는 약천사와 방주교회는 종교를 떠나서도 한번쯤 방문할 가치가 있는 곳입니다. 약천사 약천사는 제주도 남쪽 중문관광단지 가까이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국적인 중문관광단지 근처에 동양적인 사찰이 있다는 사실이 참 이색적이기도 합니다. 약천사는 마시면 건강해지는 약수가 있다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여 졌다고 합니다. 이곳은 동양 최대 규모의 사찰이기 때문에 약천사를 방문하면 그 으리으리한 규모에 깜짝 놀라실 수 있습니다. 3층 규모의 약천사 법당은 사찰이라기 보다 마치 옛날 궁궐같은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약천사 약천사는 크기가 클 뿐만 아니라 경치도 아주 좋습니다. 법당 아래로 연못과 작은 폭포, 야자나무, 돌하르방이 잘 조성되어 있.. 2019. 12. 20.
제주역사 : 고려시대 탐라 탐라는 고려시대에 속국의 형태를 넘어 고려의 한 영토로 편입되었다. 이것으 힘이 세진 고려의 강력한 국력에 의해 피할 수 없는 절차였다. 925년(태조8년) 탐라는 고려 태조의 세력이 강해지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고 그러부터 11년 후인 936년(태조19년) 12월에 태자 고말로를 입조시켰다. 제주 탐라는 침략과 정벌을 피하기 위해 고려와 긴밀한 관계를 자청한 것이다. 고려는 958년에 쌍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과거제도를 실시하고 인재를 양성할 때 탐라인에게도 과거에 응시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 결과 977년 3월에 진사시 갑과에 고응 등 3인과 을과에 3인이 급제하였다. 탐라와 고려의 긴밀한 유대관계 탐라와 고려는 긴밀한 유대 관계를 유지하였다. 태조는 종래의 자치권을 인정하고 고자견을 성주로 양.. 2019. 12. 19.
제주역사 : 삼별초와 탐라 학정과 수탈이 계속되었으면서도 탐라인들은 나라사랑과 공명심을 잃지 않았다. 사회정의 정신은 탐라인의 성품을 가름하는 중요한 특징이었다. 삼별초는 탐라인의 이 같은 사회정의 정신과 잘 어울렸다. 삼별초는 본래 개인적인 보호 차원에서 시작되었다. 제주와 말 고려시대 사회적 불안이 고조되면서 권신들은 자신들의 신변 보호와 사회적 질서 안정을 위해 힘세고 용감한 자를 특별히 골라 야간 경비를 서게 하였다. 이들을 야별초라 불렸다. 야별초는 정권 유지에 해가 되는 정적들을 제거하는데 이용하기 위한 목적도 농후했다. 1170년 무신 정중부의 난 이후 무신들 간의 정변이 반복되면서 사회적 불안은 극에 달했다. 이런 상황에 처음 최충한이 정권을 잡으면서 시작된 야별초는 그으 아들 최우에 와서 세력이 커지면서 야별초를 .. 2019. 12. 18.
제주역사 : 조선시대 제주 1392년 7월 고려가 멸망하고 이태조가 조선을 개국하였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제주의 정치 환경은 많은 변화를 경험했다. 제주의 관직에 변화가 있었고, 그동안 형식적이지만 유지되어 오던 '성주', '왕자'가 없어짐으로 탐라국이 종식을 고하게 된 것이다. 제주의 통치는 이전에 비해 상당히 체계화되었다. 1397년 태조 6년에 만호가 목사 및 첨절제사를 겸하였고 1400년 정종 2년에 판관으로 교수를 겸하였으며 1401년에는 안무사를 제주에 다시 설치하여 목사를 겸하게 되었다. 1402년에는 성주를 좌도지관으로 삼고, 왕자는 우도지관으로 개칭함으로 성주와 왕자로 이어져 온 탐라국은 종식을 고하게 되었다. 1443년 세종 25년에 안무사로 목사를 겸하고 감목사를 두었으며, 1445년 세종 27년에는 좌우도지관.. 2019. 12.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