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2년 7월 고려가 멸망하고 이태조가 조선을 개국하였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제주의 정치 환경은 많은 변화를 경험했다. 제주의 관직에 변화가 있었고, 그동안 형식적이지만 유지되어 오던 '성주', '왕자'가 없어짐으로 탐라국이 종식을 고하게 된 것이다. 제주의 통치는 이전에 비해 상당히 체계화되었다. 1397년 태조 6년에 만호가 목사 및 첨절제사를 겸하였고 1400년 정종 2년에 판관으로 교수를 겸하였으며 1401년에는 안무사를 제주에 다시 설치하여 목사를 겸하게 되었다. 1402년에는 성주를 좌도지관으로 삼고, 왕자는 우도지관으로 개칭함으로 성주와 왕자로 이어져 온 탐라국은 종식을 고하게 되었다. 1443년 세종 25년에 안무사로 목사를 겸하고 감목사를 두었으며, 1445년 세종 27년에는 좌우도지관을 폐하였다. 이원진의 탐라지에는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제주
15세기 초엽부터 15세기 중엽까지 제주에는 특별한 변화는 없었다. 1454년 단종 2년 안무사가 감목사를 겸하다 1466년 세조 12년 가을에 안무사 겸 감목사를 폐지하고 진을 두어 병마수군절제사가 목사를 겸하고 판관이 감목절제도위를 겸하게 하였다. 이 기간은 어느 정도 제주가 안정을 찾는 기간이었다.
하지만 15세기 중엽에 이르러 제주에는 왜구의 침입이 일기 시작했다. 왜구는 일본의 해적으로 고려 말부터 조선조 명종까지 우리나라르 침입하여 살인, 방화, 약탈을 일삼았다. 충숙와 1316년 부터 명종 1556년에 이르는 동안 무려 30여 회 제주를 침범해 인명과 재산피해가 심했고, 이들 왜구 중 일부는 조선인을 납치하여 인신매매까지 감행했다.
세종 19년 1437년 조정은 왜구의 계속되는 침략을 막기 위해 제주에 3성 9진 및 10수전소, 25봉수대 38연대를 정비하여 방어망을 구축했다. 그런데도 왜구의 제주 침략은 계속되었다. 조선왕조실록 탐라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1494년 4월 "왜구 오십여인이 추자도를 근거로 하여 제주 진공물을 약탁하고 사람을 살상하나 우리나라 사람은 목이나 드리우고 혼백이나 조상하며 감히 누구하나 어찌하지 못하니 가슴 아른 일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반드시 이득을 얻는 것을 기뻐하여서 또 다시 와서 작모 할 것이니 이것이 염려됩니다. 연변 진장으로 하여금 더욱 방비를 가함이 좋을 것입니다."
제주는 임진왜란에서 공격을 피할 수 있었지만 왜구의 침입 앞에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 그 과정에서 희생이 말할 수 없이 많았다. 생계도 힘든 상황에서 제주민들은 "왜구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하여 성을 축성하거나 수축한다든지 기타 부역"에 시달렸다. 김봉옥 편은 조선왕조실록 중 탐라록 1702년 7월 기록에 의하면 "제주에서 부역은 다른 지방의 갑절이나 되니 심지어 부모처자를 팔거나 자신은 고용살이를 하고 동생을 파는 지경"에 이르렀고 심지어 "부모를 판자도 58명"이나 되었다.
왜구의 침략이 잠잠해진 이후에도 제주에 안정이 찾아오지 않았다. 제주민들은 인조 7년 1629년부터 순조 말1830년까지 무려 200여년 동안 출륙금지를 당했고 자연재해로 인한 위협은 하늘이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제주에는 가뭄과 태풍으로 인한 피해가 극심했으며 그로 인한 기근이 그칠 날이 없었다.
게다가 제구에 파송된 탐관오리들로부터의 수탈은 대단했다. 이들은 가혹할 정도로 무겁게 세금을 징수했다. 조선왕조실록 탐라록에 따르면 공물을 바치는데 감귤나무에 열매가 열면 개수를 헤아려서 표시했다가 조금이라도 축이 나면 곧 징속할 정도였다. 이때문에 19세기에 접어들어서도 제주에서는 민요가 끊이지 않았다. 그것은 제주도민들이 포악하거나 반정부적이어서는 결코 아니었다. 척박한 땅, 먹고 살기 힘든 상황에서 집아 관리의 수탈이 극에 달해 더 이상 생존이 위협 받는 상황에서 차라리 스스로 생명을 끊고 싶은 상황에서 마지막으로 선택한 피할 수 없는 저항이었다.
제주에는 끝없는 수난이 반복되었다. 탐라국 시절부터 백제, 신라,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조공과 수탈과 착취의 반복이었다. 탐관오리들의 횡포가 다른 지역에 비해 두드러졌고, 삼별초의 난이 끝난 후에는 몽고의 학정과 수탈이 계속되었으며, 몽고의 일본징벌이 실패로 끝난 뒤에는 왜구의 침락이 계속되었다. 강력한 중앙정부의 등장으로 지방이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기회도 주어지 않은 상황에서 몽고와 왜구의 침략까지 받은 것이다. 몽고의 지배가 끝나고 왜구의 침입이 끝난 뒤에도 제주에는 안정이 찾아오지 않았다. 조선시대는 물론 일제의 식민통치 시대, 그리고 심지어 해방 이후에도 제주는 고난의 시대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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