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역사 : 삼별초와 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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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이야기

제주역사 : 삼별초와 탐라

by beautifultogether 2019.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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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정과 수탈이 계속되었으면서도 탐라인들은 나라사랑과 공명심을 잃지 않았다. 사회정의 정신은 탐라인의 성품을 가름하는 중요한 특징이었다. 삼별초는 탐라인의 이 같은 사회정의 정신과 잘 어울렸다. 삼별초는 본래 개인적인 보호 차원에서 시작되었다.

 

제주와 말

고려시대 사회적 불안이 고조되면서 권신들은 자신들의 신변 보호와 사회적 질서 안정을 위해 힘세고 용감한 자를 특별히 골라 야간 경비를 서게 하였다. 이들을 야별초라 불렸다. 야별초는 정권 유지에 해가 되는 정적들을 제거하는데 이용하기 위한 목적도 농후했다. 1170년 무신 정중부의 난 이후 무신들 간의 정변이 반복되면서 사회적 불안은 극에 달했다. 

 

이런 상황에 처음 최충한이 정권을 잡으면서 시작된 야별초는 그으 아들 최우에 와서 세력이 커지면서 야별초를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누었다. 이들은 최씨정권의 사병적 성격이 농후했다는 지적도 있다. 1231년 고려는 몽고군의 침략을 받았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갔다. 그 중에서 기회를 보아 탈출한 이들이 많았는데 이들을 별도로 모아 몽고군과 싸우는 일에 앞장서게 만들었다. 이들을 신의군이라고 불렀다. 좌별초, 우별초, 그리고 신의군을 합하여 삼별초라 불렀으며 이들은 특수 정예군으로 3가지 임무를 주로 감당했다. 

 

첫째 국내 치안과 포도, 금폭, 형옥까지 담당하였다. 둘째 도성의 수위와 친위대의 임무를 담당하였다. 셋째 몽고군과 싸우는데 전위대 역할을 담당하였다. 

 

1270년 6월 1일 삼별초는 천여척의 크고 작은 배에 사람과 물자를 싣고 남하하여 영흥도를 거쳐 진도에 이르러 용장성을 쌓고 몽고에 맞섰다. 그러다 1271년 5월 15일 몽연합군이 총공격을 해오자 삼별초는 함락하고 말았다. 배중손과 지도자들이 전사하고 말았다. 

 

삼별초는 이미 여몽 연합군에 의해 패전하기 전 탐라에 과군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별장 이문경을 파송하여 탐라를 정복하였다. 이문경은 관군보다 2개월 늦은 1270년 11월에 탐라 명월포에 상룩했다. 이미 2개월 앞서 영암부사 11월에 탐라 명월포에 상륙했다. 이미 2개월 앞서 영암부사 김수는 방위군 200명으로 탐라를 수비하도록 명하였고, 장군 고여림에게도 군대를 주어 탐라 수비에 가담할 것을 명하였다. 이들 관군들은 삼별초가 탐라에 상륙하는 것을 막으려고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삼별초 이문경은 명월포에서 조천포까지 교두보를 확보하고 탐라를 지배했다. 

 

탐라에 들어온 삼별초는 맹위를 떨치며 고려와 몽고를 괴롭혔다. 특별히 몽고의 일본 정벌을 위한 조선계획은 큰 차질을 빚게 되었다. 고려와 원에서는 탐라의 삼별초를 회유하려고 가진 노력을 다했다. 하지만 회유에 넘어갈 삼별초가 아니었다. 이에 탐라를 정복할 계획을 세우고 1273년 3월 고려군 6천 명, 몽고군 2천 명, 그리고 한구 2천 명, 도합 1만 명이 중국원수 김방경을 수장으로 탐라를 공격했다. 

 

김방경은 몽고장군 흔도 및 홍다구 등과 더불어 삼별초를 토벌하기 위해 제주에 상륙했다. 상륙에 성공한 김방경은 정먼 공격을 피하고 양단작전을 통해 삼별초를 공격했다. 연합군은 삼별초의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항파두성을 공격해 성을 함락시켰다. 사력을 다해 연합군에 맞서던 삼별초는 1273년 5월 6일 이문경, 김혁정, 김통정, 이순공, 조시적 등 장수들이 전사하거나 자결하면서 1231년 이래 42년간의 항몽혈투사는 막을 내렸다. 

 

제주에서의 항쟁은 1270년 11월 부터 1273년까지 불과 2년 반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 짧은 기간 삼별초는 제주에 새로운 문물과 문화를 이식시켜주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박용후가 제주방언연구에서 지적한 것처럼 "삼별초 군의 제주도 입거는 언어 풍습 등 문화 전반에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김봉옥에 따르면 "삼별초가 탐라에서 항쟁한 것은 원종 11년 11월부터 14년 5월까지 만 2년 반에 지나지 않지만 이 지방에 큰 영향을 끼쳤다. 첫째가 서울 문물의 전래와 호국불교의 확산이고 둘째가 산업상의 영향이며 셋째가 고려 무인들의 불굴의 호국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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