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사람으로 준비된 이기풍
마펫(Samuel A. Maffett) 선교사는 자신의 집에 던진 이기풍 목사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마펫 선교사는 이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1891-1893년 사이에 나와 함께 게일(J. S. Gale, 기일), 홀(E. F. Hall), 그리고 리(G. Lee) 등은 평양에 선교부를 개설할 목적으로 평양과 의주를 연속적으로 방문하였다. 1893년 봄에 리와 나는 토지를 샀으며, 지금은 여자성경학교로 쓰이고 있다. 이것이 공직자들 사이에 대혼란을 야기했으며, 사람들을 충동시켜 우리를 쫓아내기 위한 명령을 분명히 내린 것으로 알 수 있다. 수백 명의 군중이 운집하였으며, 한국말로 하자면 '야단났다"
... 그날 아침에 우리는 서문으로 걸어갈 때
경찰들로부터 돌팔매질을 당하였으며... 우리에게 돌팔매질을 했던 경찰 가운데 한 사람은 언급할 가치가 있는데, 그는 이기풍으로서 후일에 한국에서 최초로 목사 임직을 받고5 또한 최초로 선교사가 되어 제주도로 갔으며, 그곳에서 돌팔매질을 당하고 죽이겠다는 위협을 당하였다.
마펫 선교사는 이기풍이 신학생이 되고 목사가 되어 제주로 파송되는 선교사가 되었다는 것에 감격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마 이러한 일은 이기풍 자신도 상상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준비하심 이었다. 이기풍은 1893년 마펫 선교사가 처음으로 평양에 선교하러 갔을 때 그의 집에 돌을 던진 불량배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마펫 선교사의 턱에 맞췄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마펫 선교사가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 그런 그가 제주선교사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이다.
이기풍은 청일 전쟁이 한창일 때 평양이 전쟁터로 바뀌자 원산으로 피난을 갔다가 스왈른(W. L. Swallen) 선교사를 통해 주님을 만났다. 이후 그는 스왈른 선교사와 순회전도를 하며 복음 전하는 사람으로 바뀌었고 1901년에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07년에 최초의 졸업생 중 한 명이 되는 은혜를 입게 된다.
제주로 파송되는 이기풍
1908년 1월 17일 조사 한 명, 아내와 함께 평양을 출발한 이기풍 선교사는 숭동교회에서 일주일간 머문 후 제주로 향하는 여정을 시작했다.
1908년 1월 29일자 예수교신보에는 이기풍의 제주 여정과 관련된 “리목사가 제주로 발행함”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평양노회에서 택정한 제주선교사
이기풍 씨는 평양서 기차로 발정하여
제주도 가는 길에 그 부인과 조사
일인을 거느리고 본월 십칠일에 남대문
밭 정거장에 도착하매 연동 숭동
새문안 각 교회 교우들이 정거장까지
나아가 환영하고 숭동교회에서 머물다가
이십사일에 발정하였으니 수륙원로에
태평히 도달하기를 축하사오며 그곳
어두운 백성을 밝은길로 인도하여
교회가 날로 흥왕하기를 간절히
구하나이다.
제주로 가는 여정중 목포에 도착한 이기풍은 프레스톤(John Fairman Preston)과 폴시더(W. H. Forsythe)를 비롯한 현지 선교사들과 협력하며 함께 머물렀다. 그는 1908년 1월에 선교부 산하 교회에서 1주간 전도집회를 인도하였고, 2월에는 선교부 차원에서 진행되는 사경회 주 강사 중 한명으로 섬겼다. 1908년 2월 1일자 프레스톤이 그의 부모님에게 보낸 편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Preston's Letter to Father and Mother, Feb. 1, 1908. "We have a protracted meeting at Mokpo since last Sunday. I have been assisted by Rev. Vi Ki Poong, the best of the seven preachers who were graduated at our Theological Sem. last spring. He is on his way to Chaju, a large island to the South, as the first missionary sent out by the Korean Presbytery. I am on the Foreign Mission Com., and hope to visit the island this year. They are Koreans, but being so isolated, have a dialec of their own unintelligible to us. Mr. Yi is a fine man and has been preaching.“
프레스턴이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1908년 2월 1일. "우리는 지난 일요일부터 목포에서 장기간의 모임을 갖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7명의 설교자 중 가장 뛰어난 목사님인 이기풍 목사님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지난 봄에 한국 노회에서 파송한 첫 번째 선교사로 남쪽의 큰 섬인 제주로 가는 중입니다. 저는 올해에 그 섬을 방문하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 그러나 너무 고립되어 있고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그들만의 방언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씨는 훌륭한 사람이고 설교하는 사람입니다..”
제주에서의 사역을 시작하는 이기풍
이기풍은 제주에 언제 왔나? 당시 제주와 목포를 연결하는 여객선은 낏쑈마루이며 매월 3회 운항하였고 운행시간은 하루 정도가 걸렸으나 운항 중 풍랑을 만나 추자도에 표류하였다.
대부분의 사료들은 이기풍이 풍랑으로 인해 추자도에서 표류하는 바람에 4월 초순에야 제주에 온 것으로 알고 있으나 확실치 않다. 이기풍이 제주에 잘 도착했다는 소식이 4월에 전해진 것이 더욱 설득력이 있다.
성내교회 당회록에 제주교회가 1908년 2월부터 시작되었다고 밝히고 있고, 금성교회 당회록에는 3월 2차 주일부터 금성리 양석봉씨 댁에서 예배하기 시작했다고 기록하고 있어 이기풍은 1908년 2월말에 제주 산지포로 들어온 것으로 여겨진다.
오랫동안 우상과 미신의 굴레 또한 신축교란(이재수의 난)으로 서양 종교에 대해 배척이 많았던 제주는 이기풍을 환영해 주지 않았다. 오히려 극심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니스벳(J. S. Nisbet)은 “나의 친구 이기풍을 만나다”는 글에서 이렇게 증언한다.
충분히 준비를 한 후 이 목사는 1906년 제주에 도착하여 제주도의 가장 큰 도시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여기서 그는 강력한 반대에 부딪쳤고, 심한 박해를 견뎌냈다. 200명이상 되는 사람들이 그를 죽이기로 서약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친구 송문옥을 만들어 주셨는데 송문옥은 군중을 진압하고 이 목사를 구해 낼 수 있었다. 그러나 다음날 그는 어느 마을에서 전도를 했는데 밤이 되자 아무도 그에게 자기 집에서 자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서 그는 박에서 자야만 했다.
사람들이 제주성 안에 방까지 붙여가며 이기풍을 박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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