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의사비와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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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이야기

삼의사비와 종교

by beautifultogether 2024. 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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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의사비와 종교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추사로 (안성리 728-9)

 

대정읍성 한 귀퉁이에 삼의사비(三義士碑)라는 비석이 있다. 이 비석은 1901년에 일어난 신축교란(辛丑敎亂), 우리에게는 이재수의 난으로 더욱 잘 알려져 있는 것으로 강우백(姜遇伯이재수(李在秀오대현(吳大鉉) 등 세 의사(義士)를 기념하여 세운 비다.

1961년 다시 신축년이 돌아왔을 때 대정읍 주민들이 보성리 홍살문 거리에 시멘트로 세워진 것을 군사정권이 철거하였고 다시 1997년에 시멘트 비석을 묻고 대정읍 청년회에서 다시 세웠다.

크기는 비신의 높이 157, 너비 61, 두께 30이며 재질은 오석이다. 화강암 재질의 관석이 있으며, 기단은 3단으로 제주산 현무암으로 되어있다.

신축교란의 대체적인 원인을 보면 프랑스 선교사의 치외법권적 지위에 편승한 교인들이 횡포와 봉세관의 과다한 세금징수, 토속신앙과 지역 풍습을 배척하는 선교 활동, 그리고 지방관과 야합한 일본인 상인 세력이 외국인 사제에 대한 반감 등을 원인으로 지적하고 있다.

 

그래서 삼의사비의 시작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여기 세우는 이 비는 무릇 종교가

본연의 역할을 저버리고 권세를 등에

업었을 때 그 폐단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교훈적 표석이 될 것이다.”

 

물론 이 문장으로 인해 천주교측에서 비문의 성격에 대한 불만도 있었으나 그래도 양보하여 이 비석이 세워졌다니 종교가 가지고 있는 용서와 화해의 모습을 보여주는 모습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삼의사비 전문>

 

여기 세우는 이 비는 종교가 무릇 본연의 역할을 저버리고 권세를 등에 업었을 때 그 폐단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교훈적 표식이 될 것이다. 1899년 제주에 포교를 시작한 천주교는 당시 국제적 세력이 우세했던 프랑스 신부들에 의해 이루어지면서 그때까지 민간 신앙에 의지해 살아왔던 도민의 정서를 무시한데다 봉세관과 심지어 무뢰배들까지 합세하여 그 폐단이 심하였다. 신당의 신목을 베어내고 제사를 금했으며 심지어 사형(私刑)을 멋대로 하여 성소 경내에서 사람이 죽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이에 대정고을을 중심으로 일어난 도민 세력인 상무회(象武會)는 이 같은 상황을 진정하기 위하여 성내(城內)로 가던 중 지금의 한림읍(翰林邑)인 명월진(明月鎭)에서 주장인 오대현(吳大鉉)이 천주교 측에 체포됨으로써 그 뜻마저 좌절되고 만다. 이에 분기한 이재수(李在守강우백(姜遇伯) 등은 2(二鎭)으로 나누어 성을 돌며 민병을 규합하고 교도들을 붙잡으니 민란으로 치닫게 된 경위가 이러했다. 규합한 민병 수천명이 제주시 외곽 황사평(黃蛇坪)에 집결하여 수차례 접전 끝에 제주성(濟州城)을 함락하니 1901528일의 일이었다. 이미 입은 피해와 억울함으로 분노한 민병들은 관덕정(觀德亭) 마당에서 천주교도 수백 명을 살상하니 무리한 포교가 빚은 큰 비극이었다. 천주교측의 제보로 프랑스 함대가 출동하였으며 조선 조정에서도 찰리위사(察理衛使) 황노연(黃耆淵)이 이끄는 군대가 진입해와 난은 진압되고 세 장두는 붙잡혀 압송되어 재판과정을 거친 후에 처형되었다. 장두들은 끝까지 의연하게 제주 남아의 기개를 보였으며, 그들의 시신은 서울 청파동 만리재에 묻었다고 전해 오나 거두지 못하였다. 대정은 본시 의기 남아의 고장으로 조선 후기 이곳은 민중봉기의 진원지가 되어왔는데, 1801년 황사영(黃嗣永)의 백서사건으로 그의 아내 정난주(丁蘭珠)가 유배되어 온 후 딱 100년 만에 일어난 이재수 난은 후세에 암시하는 바가 자못 크다. 1961년 신축년에 향민들이 정성을 모아 제주 대정군 삼의사비(濟州大靜郡 三義士碑)를 대정고을 홍살문 거리에 세웠던 것이 도로 확장 등의 사정으로 옮겨 다니며 마모되고 초라하여 이제 여기 대정고을 청년들이 새 단장으로 비를 세워 후세에 기리고자 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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