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제주의 역사
수난의 땅 제주에 대한 기록은 참으로 오랜 역사로 거슬러 올라 간다. 중국 진나라의 진수가 편찬한 삼국지 가운데 동이전 한조 끝에 “마한 서쪽의 끝에 바다에 큰 섬이 있는데 주호가 있다. 옷은 가죽옷을 입고 소나 돼지를 즐겨 친다. 배를 타고 한중을 왕래하며 장사를 한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 주호는 제주도를 가리킨다. 이것은 제주에 오래 전부터 사람들이 존재했음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이다.
삼국유사에서도 제주에 관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신라27대 선덕여왕은 덕이 있으나 위엄이 없어 주변 나라로부터 업신여김을 받는 것으로 인해 고민하다 불력에 의해 이들 세력들을 복종시키기 위해 황룡사에 9층탑을 세웠다. 이 탑 1층에는 왜, 2층은 진, 3층은 오월, 4층은 탁라, 5층은 응유, 6층은 말갈, 7층은 단국, 8층은 여진, 그리고 9층은 예맥이었다. 이들 아홉나라는 안흥이 동도성립기에서 신라를 침략하거나 그 가능성이 있다고 거론했던 인접국들이다. 괴롭히는 9개 국가 중에 탁라는 4번째 국가였는데 여기 탁라가 바로 제주를 말하는 것이다.
제주의 명칭
과거로부터 내려온 제주에 대한 명칭으로는 탐모라, 섭모리, 섭라, 담라, 둔리, 모라, 주호, 영주 등이 있다. 탁라는 풀로 짠 옷을 입은 사람들이 사는 나라라는 뜻이다. 또한 탐라는 깊고 먼 바다에 있는 나라라는 뜻으로 바다를 건너 깊은 속에 있는 나라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제주는 바다를 건너가는 고을이라는 의미이다. 제주 명칭중 하나인 영주는 중국의 신선설에 나온 이름이다. 이 세상에 신선들이 사는 봉래산, 방장산, 영주산을 삼신산이라 불렀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삼신이 금강산, 지리산, 한라산으로 금강산을 봉래산, 지리산을 방정산, 그리고 한라산을 영주산이라 일컬어졌다.
제주의 초가
한국사 속의 제주
한국사 속에서 탐라에 대한 흔적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삼국사기에는 “백제 문주왕 2년(476년)에 탐라국에서 토산물을 바쳤으므로 왕은 기뻐하여 탐라왕을 좌평으로 삼고, 사자에게도 관작을 내려 은솔로 삶았다.”는 기록이 있다. 좌평은 1등 품계였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탐라와 백제의 관계는 매우 친밀한 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백제가 신라에 멸망했을 때 신라에 불복하는 일부 귀족 계급이 탐라에 망명하여 백제의 부흥을 꾀하였으므로 이를 징벌하기 위한 조치로 탐라를 신라의 속국으로 삼았다. 애장왕 3년(802년)에 탐라국이 사자를 보내 조공을 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탐라는 정기적으로 사자를 보내 신라에 조공을 바치며 신라와 통교를 계속한 것으로 보인다.
탐라가 신라에 조공을 바쳤지만 탐라국이라는 이름으로 중국 일본과의 교류도 활발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수나라 역사책 수서에는 탐라국에 대한 기록이 선명하게 남아있는데 “백제국에서 남해를 3일가면 탐라국이 있는데 남북은 천여리이고 동서는 수백리이다. 토산물은 노루와 사슴이 많고 백제 부용했다.”
구양수 등이 저술한 당나라 역사책 당서에는 신라 문무왕 1년 661년에서 663년까지 해당되는 “용삭 초에 탐라왕 유리도라가 사자를 보내어 입조하였고 인덕 연간에는 탐라의 추장이 내도하여 임금을 따라 태산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 인덕은 신라 문무왕 4년에서 5년까지로 664년에서 665년 사이를 말한다. 송나라 사마광이 저술한 자치통감에는 “인덕 2년에 유인궤가 신라, 백제, 탐라, 왜의 사자를 배로 서쪽을 돌아 태산사에 모이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통일신라 때 당과 신라가 활발하게 교역을 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실제로 활발한 문물교류가 이 기간에 이루어졌다. 신라에 부용된 탐라는 당과의 교류를 통해 문물을 교류하면서 활발한 교역을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1928년 8월 제주항 축조 공사장에서 발견된 한나라 화폐인 화천, 오수전, 동경, 동검, 석부, 등이 출토되었고 제주시 일도동 민가의 정원 항아리 속에 오수전이 다량으로 발견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세계문명의 중심지 당과의 교역은 단순히 무역만 아니라 조선술과 항해술 전수로 이어졌을 것으로 추론한다. 탐라는 당시 중국과의 교역만 아니라 일본과의 교류도 자연스럽게 행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일본이 당나라를 왕래하는데 탐라는 해상 통로의 요충지였다.
'제주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주 - 수난의 역사 (0) | 2019.12.30 |
---|---|
섭지코지 (0) | 2019.12.29 |
제주여행 : 절물자연휴양림 (0) | 2019.12.21 |
제주여행 : 에코랜드 (0) | 2019.12.21 |
제주여행 : 약천사와 방주교회 (0) | 2019.12.2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