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lcome207 제주 초기 기독교 역사 (제주통사) 제주통사라는 책에 보면 제주 기독교 초기 역사를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1908년 이기풍 목사가 제주에 들어와 선교하기 시작하였지만 제주의 민심은 아직 기독교를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었다. 이유는 1901년 일어난 신축교란 일명 이재수의 난의 여파가 아직까지 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주교의 박해로 시작된 이재수의 난은 도민들이 서양 종교를 접하는데 방해 요소가 되었다. 이기풍 목사는 서울에서 기독교 신자가 된 김재원 홍순흥 김행권등의 도움을 얻어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김행권에 집에 모여 예배를 드리다 초가 두채를 마련하여 10여명이 함께 모여 예배 드리게 되었다. 1910년 삼도리에 있는 옛 출신청사를 사들이고 1915년에 이기풍목사의 명의로 교회 건립 허가 신청을 총독부에 제출하였는데 지금의 성내교.. 2024. 6. 9. 제주에 표도한 서양인 (제주통사) 벨테브레 하멜 제주통사라는 책에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바로 표류인돠 표도인에 관한 이야기이다. 표류인이란 제주 사람이 풍랑을 만나 일본이나 중국 멀리 베트남까지 떠나려간 경우를 말한다. 반면 표도인은 일본인나 중국 또는 서양인이 제주로 들어오는 것을 말한다. 서양인중 대표적인 표도인은 벨테브레(박연)와 하멜이다. 1697년(인조5년) 9월 네델란드 뱃사람 얀 얀세 벨테브레가 제주에 상륙하였다. 그는 오우웨로 케르크호로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길이었는데 물을 얻기 위하여 선원 2명과 함께 작은 배로 제주에 상륙하였다가 관헌들에게 잡협다. 그 사이 모선은 떠나 버렸고 3인은 서울로 압송 되었다. 그는 박연이라는 한국이름을 가졌다. 이들 세사람이 모두 병자호란 대 출전하였다가 그중 2명은 전사하고 박연만 살아남았다... 2024. 6. 8. 제주 선교의 아버지 이기풍 1 하나님의 사람으로 준비된 이기풍 마펫(Samuel A. Maffett) 선교사는 자신의 집에 던진 이기풍 목사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마펫 선교사는 이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1891-1893년 사이에 나와 함께 게일(J. S. Gale, 기일), 홀(E. F. Hall), 그리고 리(G. Lee) 등은 평양에 선교부를 개설할 목적으로 평양과 의주를 연속적으로 방문하였다. 1893년 봄에 리와 나는 토지를 샀으며, 지금은 여자성경학교로 쓰이고 있다. 이것이 공직자들 사이에 대혼란을 야기했으며, 사람들을 충동시켜 우리를 쫓아내기 위한 명령을 분명히 내린 것으로 알 수 있다. 수백 명의 군중이 운집하였으며, 한국말로 하자면 '야단났다"... 그날 아침에 우리는 서문으로 걸어갈 때경.. 2024. 6. 7. 삼의사비와 종교 삼의사비와 종교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추사로 (안성리 728-9) 대정읍성 한 귀퉁이에 삼의사비(三義士碑)라는 비석이 있다. 이 비석은 1901년에 일어난 신축교란(辛丑敎亂), 우리에게는 이재수의 난으로 더욱 잘 알려져 있는 것으로 강우백(姜遇伯)·이재수(李在秀)·오대현(吳大鉉) 등 세 의사(義士)를 기념하여 세운 비다. 1961년 다시 신축년이 돌아왔을 때 대정읍 주민들이 보성리 홍살문 거리에 시멘트로 세워진 것을 군사정권이 철거하였고 다시 1997년에 시멘트 비석을 묻고 대정읍 청년회에서 다시 세웠다. 크기는 비신의 높이 157㎝, 너비 61㎝, 두께 30㎝이며 재질은 오석이다. 화강암 재질의 관석이 있으며, 기단은 3단으로 제주산 현무암으로 되어있다. 신축교란의 대체적인 원인을 보면 .. 2024. 6. 7. 이전 1 ··· 3 4 5 6 7 8 9 ··· 5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