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 1일에 시작된 만세운동은 제주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조천에서도 만세 운동이 일어나며 조국 광복을 위한 구체적인 행동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구체적인 행동의 시작이 바로 ‘독립희생회’이다. 이곳을 통해 독립을 위한 기금을 모금하기 시작하였다.
이 모금 운동에는 윤식명 목사 임정찬 목사 등 당시 제주에서 목회하던 3명의 목사가 모두 기꺼이 마음을 합하여 동참하게 되고 이도종과 최정식 김창언 문창래 등의 동지들을 규합해 독립희생회 제주지회를 결성하여 모금활동을 비밀리에 진행하게 된다.
독립희생회는 4450명의 회원을 갖게 되었고 군자금도 1만원에 달하였다. 이 군자금은 김창류를 통해 상해로 무사히 전달되었다.
그러나 이일은 일본 경찰에 의해 발각되었다. 조봉호를 비롯한 윤식명 김창국 이도종 최정식 문창래등 60여명이 옥고를 치르게 되었고 결국 조봉호는 고문으로 인해 대구 형무소에서 옥사를 하게 된다.
이도종도 6개월간의 옥고를 치르며 고문을 받고 석방되었는데 그로인해 한쪽 다리를 저는 후유증으로 평생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도종을 유학의 길로 또한 신앙의 길로 인도한 조봉호의 죽음은 이도종에게 있어서는 너무나도 감당하기 힘든 아픈 순간 이었다.
이즈음 모슬포교회 최정숙 영수는 수백원의 자금을 교회에 헌납하는 일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제주마을을 중 교회가 없는 큰 동리 지역에 자비로 전도인을 파송하려 하였다. 이것이 협재교회의 시작이다.
그리고 그 적임자는 평양 숭실학교에서 수학한 이도종이었다. 영혼을 구하기 위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이도종은 주저하지 않고 순종하였다. 국권 강탈의 암울한 시대 나라와 민족을 살리는 진정한 길은 복음으로 이 땅의 영혼과 민족을 일깨워 다가올 새 날과 하나님의 나라를 준비하는데 있음을 이미 이도종은 깨닫고 있었다.
협재교회 개척을 통해 목회의 길에 들어선 도종은 이 길이 주님이 부르신 소명의 길임을 확신하고 정식으로 신학교에 입학하여 부르심의 응답하기로 결단하게 된다.
목포 양동교회에서 열린 제9회 전남노회 정기회에서 신학자격 시험에 합격하고 평양에 있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신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학교가 세워진지 20년이 넘었지만 그동안 제주 출신이 없었는데 이도종이 그 역사의 시작을 알렸다.
이도종은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은 학생이다. 키는 작지만 환한 미소, 씩씩한 말솜씨와 사교성 있는 성격으로 급우들의 주목을 받았고 특히 그의 한문 실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다.
이도종은 2학년을 마치고 휴학하게 된다. 그가 학교를 휴학하고 교회를 맡아야겠다고 결심을 한 것은 더 이상 아버지에게 학비를 의지할 수 없다는 것과 졸업 전에 목회 실습을 해야 한다는 당부 때문이었다. 학교를 휴학하고 1924년 그는 삼양교회 전도사로 부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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