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해방이후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기 이전까지 좌우의 이념적 대립은 사회를 극도로 혼란 스럽게 만들었다. 1948년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5.10선거를 앞둔 4월 3일에 제주도에서는 큰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을 지경으로 확산되었고 제주도에는 비상경비사령부가 설치되어 진압 및 소탕작전이 이루어졌다. 전쟁과 맞물린 이 사건은 6년간이나 지속되었고 제주도민은 피해의 소용돌이로 들어가고 말았다.
제주 교회가 입은 피해도 사뭇 심각했는데 4.3사건으로 인해 제주출신 1호 목사인 이도종 목사가 순교하고 교인들이 실종 및 희생당하였으며 서귀포, 협재, 삼양, 조수교회가 소실되고 교회 사택 및 교인 가옥들도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조남수 목사가 쓴 <4.3진상>의 기록에 의하면 조목사는 이도종목사에게 시국이 어수선 하고 사태가 심각하니 순회목회를 잠시 멈추고 안위를 살피라고 조언하였다. 그러나 이도종 목사님 지금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자신 마저 성도들을 돌보지 않으면 누가 돌보겠냐고 하면서 한사고 조목사의 조언을 만류 하였다. 그래도 위험하니 산으로 가지말고 그나마 안전한 해안길로 다니라는 말을 하고 떠나는 뒷모습을 본 것이 마직막이었다고 한다. 이도종 목사는 공비들도 사람인데 목사를 어떻게 하겠느냐며 한사코 한 영혼이라도 살리려고 하는 마음으로 길을 떠났던 것이다.
용수교회 당회록에 의하면 6월 13일 용수교회에서 이도종 목사가 성례식을 집례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것이 용수교회 성도들과의 마지막 만찬이 되고 말았다.
이도종 목사가 순교한 날은 6월 18일이다. 그는 평소보다 일찍 길을 나섰다. 주일을 앞두고 인성, 화순교회를 돌아보기 위해서 말이다. 조카딸인 이인신 권사에 의하면 사건이 일어나던 아침 길을 떠나며 동생 이기종을 만나 “내가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니 동생이 집안일을 잘 돌보도록 하라”는 당부를 했다고 한다. 아마 이 여정에서 돌아오지 못할 수 도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암시한 것은 아닌가 생각 된다.
이 목사가 대정읍 무릉리 인향동 부근 속친 ‘고린다리’근처에 다다르자 갑자기 숲속에서 무장대들이 나와 이목사의 길을 막았다. 그는 이목사의 신분을 확인하고 “반동이다 죽여라!”를 외쳤다.
이후 이도종 목사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수 없었지만 1년이 지난후 몽치라는 무장대원이 잡힌후 그 이야기가 소상하게 전해지고 있다.
이도종 목사에게 죽음이 선포된 후 그는 서슬이 퍼런 공비들 앞에서도 주눅들이 않고 담대하게 복음의 메시지를 전했다고 한다. “당신들이 이렇게 사는 것은 하나님을 몰라 이렇게 사는 것이요 나는 비로 이렇게 죽어가지만 당신들은 나를 기억해서라고 자신들의 삶을 돌이키고 하나님을 찾고 예수님을 통해 용서받고 구원받는 길을 찾길 바라오 나는 먼저 천국에 가 있을 테니 후일에 모두 천국에서 만납시다.” 하면서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제주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주 목관아(사적 제380호)와 관덕정(보물 제322호) (0) | 2024.07.02 |
---|---|
제주의 순교자 이도종 2 (0) | 2024.06.28 |
제주의 순교자 이도종 목사 3 (0) | 2024.06.22 |
제주의 순교자 이도종 2 (0) | 2024.06.21 |
제주의 순교자 이도종 목사 1 (0) | 2024.06.2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