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양교회는 1915년 10월 1일 이기풍 선교사의 전도로 제주시 삼양2동 신평석 씨 댁에서 예배를 드림으로 교회가 시작되었다. 이듬해 오주병 교우가 초가 3칸을 예배당으로 헌납하였으며 1918년 김창국 목사가 처음으로 부임하여 1922년에 삼양2동 초가 35평의 예배당을 건축하였고 2년후에 김정복 목사가 부임하였다.
신학교를 휴학한 이도종이 삼양교회 전도사로 부임할 때에는 교역자가 없었던 때였다. 이도종을 열심을 다하여 2년간 200여명의 교우들이 있었던 삼양교회를 섬기며 헌신 하였다.
1926년 신학교로 다시 돌아온 이도종은 졸업을 한학기 남기고 윤식명 목사의 추천으로 김제 서쪽의 월성과 봉월 두 교회를 섬기게 된다. 월성과 봉월은 제주 삼양교회와 달리 교세가 매우 약할 뿐만 아니라 동학난의 영향으로 목회적으로도 감당하기 힘든 어려운 지역이었다.
월성교회와 봉월교회를 섬기던 이도종은 1926년에 신학교를 졸업하고 1927년 1월 12일 전북노회에서 강도사가 된다. 그는 1927년 6월 26일에 목사 안수를 받는다. 목사 안수를 받고 부임한 교회가 바로 김제중앙교회이다.
그러나 부흥하고 행복하던 김제중앙교회에서의 사역은 그리 길지 못했다. 교인 결혼식 주례사 중 시국발언을 하였다는 이유로 연행하여 투옥되었기 때문이다. 제주도에서의 독립군자금 모금 사건의 앙금이 아직도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일본군은 이도종 목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그를 늘 주시하고 있었다. 이 사건으로 이도종은 김제중앙교회에서의 사역을 마무리 하고 제주로 내려오게 된다.
첫 번째 제주 출신 이도종 목사는 제주도에 내려와 서귀포교회, 법환교회, 중문교회, 효돈교회를 섬기게 된다. 당시에는 목회자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순회 목회를 할 수 밖에 없었다.
1934년 5월 1일 제주노회는 제주도를 5구역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이도종이 맡은 구역을 표선과 성읍 지역이었다. 당시 성읍교회는 12년동안이나 목회자가 없었다. 그리고 표선리에는 아직 교회조차 세워지지 않은 형편이었다. 이도종은 제주에서도 가장 어렵고 힘든 지역에서 하나님나라에 대한 비전을 늘 기대하며 더 험지로 그의 사역을 옮기게 된다.
1937년 2월 부터 1939년 5월까지 약 2년간은 고산교회 위임목사로 고산교회를 목회하면서 인근 용수교회 두모교회 조수교회를 함께 맡아 순회목회를 병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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