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온 이기풍 목사에게 처음으로 예배처소를 제공한 사람이 바로 김행권이다. 그는 의협심이 많은 사람으로 이기품 목사가 제주 사람들에게 박해를 받을 때 그를 도와주었던 사람이었다.
니스벨 선고사는 “나의 친구 이기풍을 만나다”에서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충분한 준비를 한 후 이 목사는 1908년 제주에 도착하여 제주도의 가장 큰 도시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여기서 그는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고 심한 박해를 견뎌냈다. 200명 이상 되는 사람들이 그를 죽이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친구 송문옥을 만들어 주었는데 송문옥을 군중을 진압하고 이 목사를 구해 낼 수 있었다. 그러나 다음날 그는 어느 마을에서 전도를 했는데 밤이 되자 아무도 그에게 자기 집에서 자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서 그를 밖에서 자야만 했다. ”
이글에 등장하는 송문옥이 바로 김행권 이었을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김행권의 집은 성내교회 주변에 있었다. 정영삼 목사가 시무할 당시 교회 앞뜰에 있던 김행권의 집에 교회에 양도 되었다. 그리고 후에 여러 행사들을 거치면서 화단을 조성하기 위해 그의 집을 매입하였다.
이기풍 목사의 초기 사역을 도운 또다른 인물이 바로 박영효 대감이다. 그는 갑신정변의 주동자들 중에 한 사람이었으나 철종의 외동딸 영혜옹주와 결혼한 철종의 사위였기에 극형은 면할 수 있었다. 이후 미국과 일본에서 10년 동안 망명생활을 하며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서는 기독교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1894년 조선으로 돌아와 그의 뜻을 펼치려 하였으나 세상은 그를 놔두지 않았다. 1895년 을미왜변에 연루되어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게 되었고 1907년이 되어서야 고종의 특사로 다시 조선 땅을 밟을 수 있었다. 그러나 고종이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밀려나게 되자 양위 반대파로서 양위 찬성파를 암살하려 하였다는 죄목으로 제주도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당시 이기풍목사는 선교 보고를 하며 마치 제주인들을 야만인인 것처럼 묘사하여 제주 청년들에게 봉변을 당하게 되는 사건이 있었다. 박영효는 단오날에 문 밖에 나왔다가 “제주도를 악선전한 이기풍이란 놈을 5월 5일을 기하여 때려 죽인다”는 방이 붙어 있는 것을 보고 서둘어 이기풍 목사를 찾았다. 그때는 청년들이 돌을 들어 이기풍 목사를 내려 치는 순간 이었다.
그러자 박영효 대감은 돌을 내리치던 청년들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 여보게 청년들 이 무슨 추태인가.? 제주도 풍속을 있는 그대로 소개하였을 뿐이지 않는가? 설령 나쁘다면 자네들이 앞장서서 고쳐야 하지 않는가 이분은 멀리서 이곳에 복음을 전하러 오신 목사님이시네”
그때 박영효 대감의 도움이 없었다면 제주선교는 첫발을 내딛기도 전에 순교자로 이기풍 목사를 잃었을지 모르겠다. 박영효 대감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기록은 없지만 그는 기독교에 대해 호의 적이 었으며 그것이 나라를 살리는 길이라 여겼던 것이다. 박영효 대감은 이기풍 목사가 제주 선교를 착수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얼마돼지 않아 그 박해자들 중 10명이 믿기 시작했고 곧 교회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처음 제주에 왔을 때 돌에 맞을 위협을 받았으나 조랑말을 타고 제주 전역을 순방하거나 일손을 도우며 헌신과 사랑으로 전도한 결과 불과 3년 만에 이기풍은 제주 사람들에게 대단한 사랑을 받는 복음의 역군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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