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선교의 아버지 이기풍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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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이야기

제주 선교의 아버지 이기풍 4

by beautifultogether 2024. 6.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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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부터 1915년까지 7년가 이기풍 목사는 많은 선교의 결실을 거두었다. 그 대표적인 증거가 그를 통해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바로 교회를 세운 것이다. 삼양교회, 모슬포교회, 법환교회, 중문교회, 용수교회, 한림교회, 금성교회, 조천교회, 세화교회, 성읍교회들이 바로 이기풍목사의 영향으로 세워진 교회이다. 지금도 제주 땅에 교회 하나 세우기가 어려운 여건인데 그 당시에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기적같은 일이다.

이기풍 목사의 초기7년의 사역은 제주 복음의 씨앗을 심는 기간이었다. 그가 건강이 악화되어 1915년에 선교를 잠시 중단 했던 것은 이제 교회가 태동하는 제주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아쉬운 일이었다.

1915년 조천교회의 세례와 학습문답을 한 것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사역을 할 수 있는 몸이 아니었다. 성대에 이상이 생겨 도무지 말을 할 수 없었다. 말을 하여도 발음이 분명하지 않고 쇳소리가 나고 목에 통증이 있었다. 그는 피터지게 복음을 외치다 목소리를 잃고 만 것이다. 그는 자신의 성대가 닳도록 복음을 외친 것이다. 자신의 소리를 다해 주님을 외치고 또 외쳤던 것이다.

이후 이기풍 목사는 노회에 청원하여 일년간의 병가를 허락받았으며 이 문제를 위임받은 광주지방 시찰위원은 1915년 9월에 이기풍 목사를 대신하여 최대진 목사를 파송하게 된다.

일년의 병가후 그는 건강을 조금 회복하여 광주 북문안교회에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2년간 열심히 사역하였으나 다시 건강이 악화되어 사임하고 1919년 10월부터 순천읍교회 담임으로 부임하여 1920년에는 전남노회 노회장으로 1921년에는 제10회 총회장에 선출되었다.

1915년 건강상의 이유로 제주를 떠났던 이기풍목사는 1927년 다시 제주를 찾게 된다. 성내교회로 돌아온 이기풍 목사는 제주선교의 비전과 꿈을 잊어 버릴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제주에서 그의 마지막을 다 보낸 것은 아니다. 그는 1931년에 성내교회를 사임하고 벌교교회로 이명한다.

이기풍 목사의 여정을 어떻게 다 말로 표현 할 수 있을까? 복음의 불모지 조선에서 복음이 받아들여지기까지의 여정은 이기풍 목상의 생애를 통해서 보더라도 고난과 역경의 시간이었다. 그는 높은 곳을 향한 사람은 아니었다. 총회장까지 지냈지만 그는 복음을 필요로하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갔다. 이기풍 목사의 마지막 사역지가 여수 금오도에 있는 우학리교회였다는 것만 보더라도 그가 높아지려 했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신사참배를 반대한 이기풍 목사는 4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 4년간의 옥고는 그의 몸을 완전히 산산조각 내었고 결국 그는 1942년 75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이기풍 목사의 묘지는 전라남도 화순에 있는 광주제일교회 교회묘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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