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3년 스파르웨르호(Sparrow Hawk)라는 이름의 네덜란드 선박이 대만의 타이완으로부터 나가사키를 향해 출항했다. 그러나 그 배는 결코 나가사키에 도달 할 수 없었고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1666년까지 그 배와 관련된 어떠한 소식도 받지 못했다. 이후 1668년 로테르담에서 “1653년 타이완에로의 스파르웨호의 불우한 항애에 관한 일지 : 스파르웨르호가 제주도에서 좌초된 이유와 더불어 조선 왕조의 영토, 지방, 도시, 요새에 관한 특별한 묘사”라는 내용의 이야기라 하멜에 의해 발간 되었다. 이것이 바로 “하멜 표류기”이다.
1653년 1월 10일에 네덜란드를 떠난 배는 6월1일에 되어서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도착하였다. 이후 7월 16일에 대만에 정박하였고 7월 30일에 나가사키를 향해 다시 출항하였다. 그러나 8월 1일 이배는 폭풍을 만나고 만다. 중국 연안과 대만 사이를 반복하며 오르락 내리락 하던 배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보았다. 항해를 계속해오던 8월 15일 밤에 폭풍은 배를 삼켜버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폭풍을 뚫고 배는 육지에 다다랐다.
배는 산산이 부서졌고 64명으로 출발했던 선원은 36명으로 줄어들었다. 그리고 대부분이 부상을 입어 거동하기도 힘든 모습이 되고 말았다.
여기가 어딘지조차 모르던 그 때 처음에는 한사람 그 다음에는 세사람 그 다음에는 백여명 그 다음에는 2000명이 넘는 군인들이 우리를 감싸고 있었다. 우리는 나가사키로 가는 중이라고 손짓 발짓을 다 했지만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들은 일본을 왜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밥을 주며 우리를 안심시켰다. 조타수가 관측한 결과치를 보니 이곳이 제주도임을 알게 되었다. 이원진 목사의 배려로 제주에서의 생활은 지낼만 했다. 이원진 목사가 하멜 일행을 만난 것은 효종실록 4년(1653) 8월 6일(무진)에서 확인 할 수 있다.
10월 29일 하멜일행은 제주에서 벨테브레라는 네덜란드 사람을 만난다. 그도 역시 풍랑을 만나 표류하던중 조선에 머물게 되었다고 한다. 벨테브레를 처음 만났을때 그의 나이가 58세였는데 한국에 너무 오래산 나머지 모국어를 잊어 처음 만났을 때에는 의사소통조차 하기 힘들었다.
제주도에 머물면서 몇번이고 탈주할 생각을 하였지만 뜻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우리는 서울로 압송 되기 위해 배에 올랐다. 해남 - 영암 - 나주 - 장성 - 정읍 - 태인 - 김제 - 전주 - 연산 - 공주 - 경기도 - 한강 - 한양 이 모든 여정이 만만치 않았다.
서울에 온 하멜 일행은 훈련도감에 소속되어 전쟁에 관련된 일을 하였다. 서울에 올라 와서도 틈틈히 탈주 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청나라 사신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하였지만 그것마져 여의치 않았다. 때로는 발각되어 죽음을 맞게 되는 동료도 있었다. 다행히 효종이 하멜 일행을 돌보려는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왕 곁에서는 지속적으로 머물 수 없어 전라도로 내려 가게 되었고 벨테브레와의 만남도 더이상 이루어 지지 않았다.
강진으로 내려온 하멜 일행은 그곳에서 때로는 구걸을 하며 때로는 병영을 풀을 뽑으며 생활했다.
1663년 나라의 사정이 좋지 않자 하멜 일행은 좌수영과 순천으로 이동하였다. 때로는 좋은 수사를 만나 편하게 지내기도 한 반면 때로는 혹독한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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