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발을 내딛 이기풍을 환영하는 곳은 없었다. 오히려 그를 박해하며 예수믿으면 모가지가 날라간다고 협박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런 위기의 상황 가운데 하나님은 불길 같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 제주를 사랑 하시기로 마음 먹은 것 같다.
박영효 대감은 초기 이기풍의 선교 사역에 큰 힘을 보테 주었다. 그는 제주 유배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이기풍이 제주 선교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기풍의 놀라운 헌신과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인해 제주도에 파송 받은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1908년 독노회 앞에 원입인 9명 주일 출석 20명이라는 선교 결과가 보고 되었다. 짧은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결실이 가능했던 이유는 이기풍이 제주도에 도착하기 전 이미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했다가 예수를 영접한 김재원과 젊은 구도자 김행권 홍순흥의 협력이 주요했다. 김재원과 홍순흥을 1917년 4월 1일 제주도 최최의 장로가 된다.
또한 이선광 김형재 같은 전도인을 제주로 파송하여 이기풍의 사역을 도왔다. 1909년 제3회 독노회에 참석한 이기풍은 아래와 같이 선교 보고를 한다.
1. 이기풍 목사와 김홍련 전도사는 열심히 전도하였으며
2. 평양성교회 자매들이 연호하여 이씨 선광을 제주 여전도인으로 파송하여 마을 부인들 중에 열심히 주를 믿는 주민들이 생겼으며
3. 평양대중학교 학도들이 연보하여 대학도 김형재 씨를 제주 전도인으로 파송하여 넉 달 동안 열심히 전도하였으며
4. 제주 전도된 형편이온즉 열심히 믿는 형제들이 생겼사오며 또 주를 위하여 핍박받는 형제도 있사오며
5. 성서공회에 교섭하여 제주에 모셔온 사람들을 두되 제주에서 믿는 형제 중에서 택하기를 경룬이오며
...
12. 제주 여전도인 이씨 선광을 일년동안 또 보내기를 작정하였사오며
또한 선교사들의 관심도 남달랐다. 프레스톤, 유진벨 선교사들이 제주를 방문하여 제주도 선교에 힘을 보태 주었다. 두 사람의 방문 소식이 미셔너리지 1909년 4월호에 실린 것을 보면 두 사람의 제주 방문이 큰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프레스톤이 그의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서도 제주 선교의 비전을 발견할 수 있다.
“저는 한국의 남쪽 제주를 2주간 방문하고 돌아왔습니다. ... 우리 한국교회 내지 선교지인 제주에 아주 흥미 있는 선교여행을 가졌는데 전 사역이 현지 한국 교회에 의해 운영되고 지원을 받아 진행됩니다. 1년 6개월 전 제주선교사역이 시작된 이후 이루어진 진보를 목도하고 대단히 기뻤습니다. 그곳에는 이미 4개 그룹의 기독교인들이 있으며 기회는 대단합니다. 나는 몇장의 흥미로운 사진은 찍었는데 잘 나오기를 희망합니다. 만약 시간이 있으면 그 여행에 대해 여러 자으이 종이에다 기술하려고 합니다”
프레스톤과 함께 제주를 방문한 의료선교사 폴시더의 보고도 참으로 흥미롭다.
“프레스톤과 한주간 제주 여행을 했으며 섬 주민들이 교회 예배에 참석하고 진료를 받으려는 열심은 정결한 어린 양의 속죄의 능력뿐만 아니라 병과 고통으로 부터의 구원에 대한 그들의 필사적인 요구의 애절한 증언이다. 우리는 더 많은 의료 순회가 수행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첫 방문 때 많은 환자들을 돌본 목포진료소에서 온 학생들을 통해 제주에서 약2개월 동안 의료 사역이 계속되었다.”
비록 제주가 선교사들에게 직접 할당된 선교구는 아니었지만 전라도를 책임 맡은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당시 전라도에 속한 제주도에 대해 모종의 책임을 느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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