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봉호와 군자금 모금활동>
1919년 3월 1일에 시작된 만세운동은 일제 치하에 있었던 대한민국 사회에 적지 않은 파장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 결실로 1919년 4월 1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이를 재정적으로 뒷바침 하는 ‘독립희생회’의 비밀 결사대가 조직되었다.
1919년 5월 당시 독립희생회의 연락원이었던 김창규가 제주도로 비밀리에 들어왔다. 그는 곧바로 당시 성내교회 전도사로 시무하던 조봉호를 찾아 독립희생회 제주도지방조직을 만들었고, 임시정부의 선포문과 해외통신물을 전달하고 광복군 군자금 모금에 대한 활동을 요청했다.
이러한 군자금 모금 운동은 교회를 중심으로 제주 사회에 급속도로 퍼지게 되었다. 김창국 목사를 비롯하여 윤식명 목사, 임정찬목사, 이도종목사가 적극적으로 활동하게 되었고 두달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회원이 4,450으로 늘어나게 된다. 더불어 1만원(현 가치로 10억정도)의 군자금을 모아 임시정부에 전달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일은 결국 일본 경찰에 의해 발각이 되어 조봉호는 대구로 압송되었고 가담자들의 모든 십자가를 지고 대구 형무소에서 1920년 4월 28일 37세의 젊은 나이로 주님 품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의 시신은 찾아가는 사람이 없어 방치되었다가 사라지고 말았다.
조봉호는 신앙의 열정으로 이기풍 목사 김재원 장로와 함께 교회를 세우는데 앞장 섰으며 누구보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애국의 마음으로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하였다.
한국자유총연맹 제주도지회에서는 제주도민의 이름으로 사라봉 모충사에 그의 애국정신과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1977년 1월 11일 순국지사 조봉호 기념비를 세웠다.
다음은 기념비에 새겨진 ‘순국행장’의 내용이다.
“3.1 독립만세 운동이 전국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번지자 제주에도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고 기독교 교인들 간에는 독립희생회 제주지방 조직을 서둘도다. 조봉호는 김창국 최정식 김창언 문창래 이도종 김창규와 더불어 독립희생회 지방 조직에 착수하고자 임시정부헌장 선포문과 조신의 독립을 파리 강화회의에 제출한 소식을 담은 해외통신문을 입수하여 은밀리에 보사 배포함녀서 동지 규합에 나서도다. 특히 상해임시정부 활동을 돕고자 독립군 군자금 헌납운동을 적극 전개하여 도민 4,450여 명으로부터 1만원을 모금, 동년 7월 상해로 송금하도다. 그러나 이 사실이 왜경에 탄로 되어 동년 7월 20일 조봉호 등 관련자 60여 명이 검속되자 조봉호는 스스로 모든 일을 책임지기로 결심 동지들을 구한 후 홀로 총 책임을 지고 왜경의 심판을 받도다. 그리하여 동년 11월 12일 대구 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의 언도를 받아 대구형무소에서 수감 복역하다가 서기 1920년 4월 28일 옥사하도다.”
참고로 모충사(제주시 사라봉길 75)에는 조봉호 기념비를 포함하여, 1907년 고종황제의 강제 퇴위에 항거해 제주의병 거사를 도모하다가 체포 돼 순직한 의병들을 추모하며 세운 의병항쟁 기념비와, 1794년 큰 흉년 때 굶주리는 제주 동포를 위해 거금을 출연, 육지에서 양곡을 사들어 구휼한 의인 김만덕의 기념비가 함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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