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멜의 제주 표착
벨테브레 다음으로 한국에 온 그리스도인은 1653년 동아시아의 교역을 위해 일본 나가사키로 가다가 폭풍을 만난 하멜(Hendrick Hamel) 일행이었다.
하멜 일행이 제주도에 표착할 때의 제주목사는 이원진이었다. 이원진은 조정에서 지금까지 제주에 파송된 관리 가운데 중요한 업적을 남긴 제주민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은 관리였다.
1653년 1월 10일 화란 상인 하멜 일행을 실은 네덜란드 무역선 스패로우 호오크(Sparrow Hawk)호는 테셀(Texel)을 떠나 나가사끼를 향하고 있었다.
1653년 8월 15일 하멜 일행은 폭풍 가운데 육지를 보게 되었고, 그 순간 거대한 파도로 인해 선창에 누워 있던 사람들이 익사하게 되자 선장은 전능하신 하나님께 맡기자고 외치고 그 외침에 따라 선원들은 그 육지를 향해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곳이 바로 제주도다.
탑승원 64명중 선장 에흐베르츠를 포함한 28명이 익사하였고, 36명이 가까스로 물에서 기어올라 제주도에 표착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탐라록에는 하멜 일행의 표류와 관련하여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제주목사 이원진이 치게 하기를 “배 한척이 본주 남쪽에서 파선하여 해안에 표도하였기로 대정현감 권극중, 판관 노정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가보도록 하였는데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 수 없습니다. 배는 바다 속으로 전복되고 생존자는 38인입니다. 말이 통하지 않고 글자 역시 달랐습니다. 배안에는 많은 약재와 녹피등 물건과 목향 94포 용뇌 4항 녹피 27000장이 있었습니다. 푸른 눈에 높은 코, 노란 머리에 짧은 수염인데 혹은 수염을 깎은 자와 윗 수염만 남긴 자도 있었습니다. 그들의 옷은 길어서 넓적다리까지 미치고 사규 금방 수저가 같이 연이어 있습니다. 하복은 옷의 주름이 치마와 같습니다. 왜어를 아는 자를 시켜 묻기를 너희들은 길리시단이냐 하니 모두가 야야 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쪽을 가르키며 물었더니 고려라 하였고 본도를 가리켜 물었더니 오질도라 하였습니다. 중국을 가르키며 물으니 혹은 대명이라 하였고 혹은 대방이라 칭하였습니다. 서북쪽을 가르키며 물으니 달단이라 하였고 동쪽을 가르켜 물으니 일본이라 하고 혹은 나가사기라 하였습니다. 이어 그들에게 어느 곳으로 가고자 하느냐 물으니 나가사기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조정은 명하여 서울로 올려 보내도록 하고 전에 온 남만인 박연에게 그들을 보게 하였습니다. 과연 이들은 만인이라 하므로 드디어 금려에 편입시켰는데 대개 그 사람들은 화포에 능숙하고 혹은 코로 취소하는 사람도 있고 혹은 말로 춤을 잘 추는 이도 있었습니다.
조선땅에 먼저온 벨테브레가 하멜 일행의 통역을 맡았다는 것도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제주도에서 시작된 하멜의 표류는 한국에서의 13년간의 기록을 남겼다.
하멜이 그리스도인이냐 하는 문제는 그의 표류기 끝부분의 기록으로 증명되고 있다.
“살아돌아온 우리 9명은 13년 28일에 걸친 긴 포로생활에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하였으며, 아울러 뒤에 떨어져 있는 우리의 불쌍한 동료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크신 자비를 베풀어 주실 것을 간절히 기원하였다”
하멜은 그리스도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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